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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의 생각] 잊을 수 없는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사의 혼!

대한민국 헌정회 부산지회 

중국하면 언젠가는 아시아의 패권을 위하여 마지막 승부를 가려야 할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생각한다. 일만 년의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동이족 한민족 한국은 한족 중국과 아시아 패권을 위해 마지막 승부를 가려야만 한다.

 

5000년 전에는 한의 나라 한민족이 유라시아의 패권 국가였으며 고조선, 고구려, 고려 초기 즉 1000년 전까지만 해도 예, 맥, 한韓족의 동이족 한국대륙과 화족(한漢족) 중국대륙은 양대 강국으로 엎치락뒤치락하곤 했다. 지금은 빼앗긴 만주대륙과 잃어버린 상고사를 되찾기 위해 중국에 대해 고민한다. 그때마다 장개석총통과 훙커우(루쉰)공원에서 만난 중국인이 생각난다. 

 

필자가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방문한 후 훙커우(루쉰)공원에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을 들렀다가 나오는 길이었다. 어느 노 화가가 훙커우(루쉰)공원의 길에서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그림과 글을 길바닥에 그리고 쓰는 것을 보았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며 30년을 넘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며 반복하고 있으며 아마 죽을 때까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화가는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윤봉길 의사라고 말한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루쉰)공원에서는 일본군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이 열렸다. 윤봉길은 오전 7시 50분 경 일본의 막강한 군사력과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행사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11시 40분경 단상을 향해 수통 폭탄을 투척,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훙커우(루쉰)공원을 강타했다. 폭탄은 노무라 중장, 시게미쓰 주중공사 면전에서 터졌으며 이로 인해 육군대장 시라가와, 거류민다니장 카와바다 사망이 사망하고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 해군총사령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주중공사 시게미쓰, 주중총영사 무라이, 민단 간부 도모노가 각기 중상을 입었다.

 

며칠 동안 치밀하게 공원 내외를 답사하면서 계속해서 거사 장소를 익히고 실수가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완료했던 윤봉길 의사, 그는 끝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성공하였고, 각국은 찬탄하며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 윤봉길 의사는 우리 민족에게 민족 재기의 신념과 희망을 제공하고 한동안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하는 계기를 마련함은 물론 일본에게 경고장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거사 직후 현장에서 잡혀 오랜 시간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그 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라며 대한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그는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12월 19일 25세의 젊은 나이에 총살당하고야 말았다. 윤봉길의사 시신은 일본 가나자와시 초소 옆 통로에 매장하여 오가는 사람들이 시신을 밟고 다니면서 시신마저 능멸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과 모함에도 중국의 지도자 장제스는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라고 격찬하였다.

 

훙커우(루쉰)공원에는 일본정부가 시라카와 기념탑을 세웠으나 1945년 중국이 공동승리 후 상해시민들이 시라카와 탑을 없애고 상해임시정부와 윤봉길의사기념관을 건립하고 주변에 윤봉길의사의 아호 매헌을 상징하는 매화나무를 심어두고 윤봉길의사를 추모하고 있다. 참으로 가슴 뿌듯하고 감격적인 순간이다. 필자의 머리에는 그 모습이 떠나지 않고 가슴을 뜨겁게만 한다. 

 

윤봉길 의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동받은 장제스 총통은 그 후 한국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중국무관학교 한국특별반을 만들어서 독립운동지도자를 양성하여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창설하게 하였다.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독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윤봉길의사 동생과 아들을 대만으로 초청하여 국빈대우를 하였다.

 

하지만 똑같은 한漢족인 중국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를 보라. 또한 똑같은 한漢족의 나라 자유민주주의국가 대만과 공산주의 중국의 행위를 보라. 중국의 동북공정을 마치고 고조선, 북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 조선 등 3·8선 이후를 중국의 지방정부로 편입하여 중국영토와 역사를 왜곡 날조하는 현실이다. 더 분개할 일은 제국주의 침략주의 유혹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며 아직까지 외세의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사리사욕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식민사관 사대사관에 깊이 빠진 역사학자와 공직자와 정치인과 국민이 있다는 것이다. 처참한 현실을 생각하니 윤봉길의사의 애국정신과 사명감을 가진 열사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윤봉길 의사 그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농민독본」이라는 책을 저서하여 계몽운동과 농민운동을 통해 민족 얼의 고취를 도모하였다. 1929년부터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을 하다 일제탄압이 강해지고 한인을 타살하는 현장을 보고 혁명의 길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무력투쟁을 각오하고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상해로 가서 김구를 만나 총을 요구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사령관의 암살에 성공하여 임시정부의 위상을 높였다. 중국인들마저 중국도 하지 못 한 자기들의 원수를 갚는 일을 한국청년이 이루어내었다는 존경하고 추모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한국 한국인 정체성과 자존심과 자부와 긍지를 가진 위대한 한민족의 정기와 기백을 온 천하에 알렸다.

 

요즈음처럼 살얼음판을 걸어야 하는 한국 한국인의 운명 속에 온 국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우리 선조들이 이루어 놓은 고구려 정신을 되짚고 참다운 한국인의 정신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촛불과 태극기를 높이 들자고 외쳐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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