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21뉴스]정대수 기자= "아라는 열정이 넘치는 가수였다고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어요"
아라는 올해 데뷔 10년 차 가수로, 늦은 나이에 꿈에 뛰어들어 10년 동안 쉬지 않고 꾸준히 달려왔다. 그 노력 때문인지 현재 부산소방재난본부의 홍보대사를 5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는 "어릴 때 6살 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네 노래대회 등에 참가해, 상품을 자주 타곤 했다. 또 동네 어르신들 모여 계시면 춤추고 노래하고 하는 걸 좋아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의 꿈을 가졌던, 아라는 성인이 되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으나,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는 "대학 이후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가수의 꿈을 접게 됐다. 이후 사업을 시작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라면서 "그 이후 여러모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말했다.
사업 실패 후, 몸마저 아팠던 아라.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던가. 그에게는 꿈을 향해 도전할 수 있었던 새로운 기회로 다가왔다. 그동안 접어왔던 가수라는 꿈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30대 후반.
그는 "너무 힘들어서 모든 걸 잊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그때 노래를 안 하면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금 노래를 안 했으면 이 자리에도 없었을 것 같다"라며 가수를 시작한 계기를 설명했다.
아라가 가수의 길을 걸어가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어머니'라고 한다. 그는 "처음 음반을 발매하기 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자존감마저 떨어져 있었다. 그때 용기를 주며, 응원해주신 분이 바로 어머니다. 그래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됐다. 지금은 어머니도 흐뭇해하신다”라고 말했다.
오로지 열정으로 가수라는 길에 도전장을 내밀고, 사업할 때 조금 모아두었던 돈과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합해 데뷔 2년 만에 1집 앨범 'hot 하게 cool하게'를 발매했다.
1집 앨범을 발매 후, 무대를 가리지 않고 밤낮없이 발로 뛰었다. 그는 "동네 작은 행사부터 요양병원, 주간보호센터, 복지회관, 복지센터 등 3년간 재능기부 봉사를 다니며 가수 아라를 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음반 녹음을 위해 타고 다니던 차를 팔았던 터라, 행사 시 대중교통을 이용했다는 아라는 "주요 이동 수단이 버스 지하철이었다. 당시 노선이 익숙하지 않아, 종종 잘못 타기도 했다. 그리고 무대 복장도 다 들고 다니다 보니, 이동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하는 게 좋았고, 즐거웠다. 그래서 어려움도 충분히 버텨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꿈을 향해 쉼 없이 달렸다"라며 에피소드를 풀어냈다.
발품을 팔면서, 그렇게 아라는 가수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덕에 한 달 평균 15곳, 최대 50곳까지 행사를 소화하는 유명 가수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 가운데서도 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행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어르신들 계신 곳을 갈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나에게 할머니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밖에서 장사하다 보니 할머니가 저를 많이 보살펴 주셨다"며 "성공해서 할머니께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지난 코로나19 시기에 돌아가셨다. 현재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해, 너무나도 아쉽고, 늘 가슴에 할머니가 자리하고 계신다“며 할머니를 향한 애틋한 손녀의 마음을 전했다.
이어 "어르신들이 다들 호응해주시고 즐거워해 주실 때 너무나 기쁘다. 또 가끔 장애인 행사도 접할 때가 있는데 서로 다름에도 노래로 소통하고 호흡할 수 있어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10년간 무대를 지켜왔던 가수 아라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자신의 무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그 무게는 너무도 무거웠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안 될 때가 있었는데 이때 슬럼프가 크게 왔다"며 "가수에게 악기는 목이다.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짜 포기하고 싶었고,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상당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음을 다잡고자 계속해서 스스로 채찍질을 하기도 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극복해야만 했다. 여기서 포기하면 끝이라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무대에 나섰다. 그리고 주위 선후배님들과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서서히 제모습을 되찾았고, 그렇게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슬럼프를 극복하자마자,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사람들의 눈이 너무나 무서웠다는 것.
아라는 "가수를 시작한 초반에는 많은 사람이 겉모습을 보고 저를 판단했었던 것 같다”며 “어린 나이에 시작했고, 몇 년 후에 대형 무대에 오르자, 많은 이들이 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구설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공황장애라는 게 찾아왔다"며 토로했다.
슬럼프에 이어 공황장애까지, 가수 아라는 여기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철저하게 자기관리에 나섰다. 공연, 운동, 연습, 강연 등 하루 일정을 빽빽이 소화해 가며, 버텨냈다.
그는 "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갈수록 더 떳떳하게 다녔다.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밥자리, 술자리 등도 하지 않았고, 공연이 없는 날에는 운동, 공연 연습, 밴드 합주, 트레이닝, 강연을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오히려 행동으로 저 자신을 보여주며, 입증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자신을 이 길로 이끈 원동력은 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슬럼프와 공황장애 등 어려울 때마다 팬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이겨낼 수 있었다며, 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는 "행사를 위해 혼자서 지방에 갔을 때다. 다른 가수들의 현수막과 팬클럽이 응원하는 모습을 보며 위축되곤 했었다"며 "그런데 어느 날부터, 저의 팬클럽 회원분들이 지방공연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기뻤고, 감사했다. 그 이후로 지방공연 등을 다닐 때마다 항상 현수막을 제작해서 게시하고, 각종 행사 때마다 제일 앞줄에서 적극적으로 응원도 해 준다. 팬들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아 더 힘을 내 노래를 할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분들이다”라며 감사를 전했다.
10여 년 동안 가수라는 직업으로 살면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아라. 그래서 그는 지역에 공헌하며 그 사랑을 환원하고 있다.
부산소방재난본부 홍보대사를 5년째 이어오고 있는 가수 아라. 소방재난본부 일이라면 모든 것을 제쳐두고 뛸 정도로 홍보대사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그는 "소방관으로 재직했던 지인의 추천으로 소방재난본부와 홍보대사 인연을 맺게 됐다"며 "처음 홍보대사를 맡은 후 제 곡 중 '구인광고'란 노래를 개사해서 전국적으로 소방본부 일을 홍보했다"며 "이후 소방인들을 위한 노래 '운명 속으로'란 곡을 3집 앨범에 수록하면서 이들의 수고와 헌신을 널리 전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래 박자가 빨라 흥이 나는 곡이지만, 그 곡 속의 가사를 자세히 들어보면 소방인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귀띔했다.
지금까지 약 5,000회 정도 무대에 오른 가수 아라는 사람들에게 '열정 넘치는 가수'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는 "전국노래자랑에 초청 가수로 출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타이밍이 맞지 않아 아쉽게 출현하지 못했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면서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하는 가수가 되는 게, 지금의 목표라고 말했다.
끝으로 가수 아라는 "많은 사람이 제 노래를 들으면서 열정의 에너지를 받았으면 좋겠다"며 "웃음과 열정을 전해줄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 죽는 날까지 무대에서 노래하고 싶다"며 노래에 대한 열정을 듬뿍 쏟아냈다.
트로트계 살아있는 전설, 엘리제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수 이미자의 노래 중 ‘노래는 나의 인생’이란 곡이 있다. 최근 트로트 황태자 임영웅이 리메이크하면서 다시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곡의 가사 중 ‘아득히 머나먼 길을 따라 뒤돌아보면은 외로운 길 비를 맞으며 험한 길 헤쳐서 지금 나 여기 있네’라는 대목이 있다.
가수 아라에게 남은 인생의 길은 아직도 멀고, 협착할 수 있다. 하지만 찬찬히 그 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풍경도 있고, 때로는 구불구불한 길도 만날 수도 있다. 이 인생길에서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행복한 길이었다며 되돌아볼 수 있는 그런 가수 아라가 되길 기대해 본다.